게임 내러티브 디자이너로 살아남기

불완전한 세계의 디자이너로 버티며 남겼던 생존 기록을 읽어 보았습니다.
내가 왜 이 업을 택했는지에 대한 글을 한 번 쯤 적고 싶단 생각을 했습니다.
어쩌다 이 직업을 선택했고, 그렇게 8년이 지나갔습니다.
돌이켜보면 많은 일을 한 것 같기도 한데, 막상 정리를 하려니 ‘그동안 뭘 했지?’ 싶은 순간이 오더군요. 그래도 다행히, 개발하며 느낀 점들을 노트에 간간이 남겨두었습니다. 꾸준히 쓴 건 아니었지만 몇 년간의 기록이 남아 있었습니다. 이 글을 쓰며 그 기록을 다시 꺼내 읽었습니다. 재밌는 기록이었어요.
사실 저는 어릴 때부터 게임에 열성적으로 빠져 있던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역사와 영화, 책에 빠져 지내던 시절 덕에 ‘나는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어렴풋이 있었습니다. 대학교를 지나며 게임이라는 매체도 이야기를 전달하는 수단으로서 매력적이라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그즈음에서야 게임을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자라났고, 운 좋게 대학 졸업 때 쯤 게임 회사에서 인턴으로 일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첫 업무는 플레이어가 싸워야 할 보스 몬스터를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막내였으니 그냥 보편적으로 생각하는 악당 캐릭터를 쓰면 되겠거니 했는데, 회의가 진행되더니 갑자기 ‘오랫동안 봉인된 신을 때려잡는 이야기’를 써야 했습니다. 그때 알았습니다. 게임 회사에서 이야기를 만드는 일이란, 신입에게도 신을 때려잡는 이야기를 맡기는 곳이라는 걸.
그렇게 우당탕탕한 적응기가 시작됐었지요.
3년쯤 지나자, 개발 결정이 수시로 바뀌는 현장을 겪으며 낡고 지친 직장인으로 진화하게 됩니다. 그 무렵 좋은 개발팀, 좋은 리더십에 대해 고민하다가 동료들과 나눈 대화를 정리해 ‘개발의 함정’이라는 글을 썼더라고요. 읽다 보니 귀여운 구석도 있었지만,
그 시절의 고민이 지금의 나를 만든 것 같단 생각도 듭니다. 몇몇 글에서 좀 웃음이 터졌기에 여기에 옮겨 봅니다.
프로토타이핑의 함정 :
우리가 보려고 하는 검증하려는 게 시스템일까? 아니면 그게 게임 내에서 돌아가는 특정 상황에 대한 경험일까?완성된 디자인에서 보는 게 확실할 거라는 착각이 오히려 충분한 검증을 못 하게 만든다.
실패를 교훈으로 남기기의 함정 :
많이 실패하는 것이 능사는 아니다.
이터레이션을 돈다는 건, 목표와 결과물을 확인하는(훌륭/괜찮/미흡) 기준을 세울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우리가 어떻게 가고 있나를 판단하지 못하면 그냥 실패일 뿐.
이 거친 글을 보면서 대체 무슨 시절을 보냈던 걸까 싶습니다.
이즈음 든 의문은 이렇습니다. '한국에서 하는 게임 개발과 해외 개발팀은 무엇이 다를까? ' 왜냐하면 해외의 게임들은 좋은 스토리텔링으로 게이머들에게 어필을 하고 있었으니까요. 운 좋게도 2년 뒤, 2022년에 북미 콘솔 게임 내러티브 담당자와 인터뷰할 기회가 생기게 됩니다. 늘 저도 서사 좋은 콘솔 게임은 어떻게 개발되는지 궁금했던지라, 그들의 이야기를 엿들을 수 있는 건 좋은 기회였습니다.
서사는 글로만 전달되지 않는다. 팀 전체가 같은 비전을 공유해야 한다. 그 수단을 어떻게든 찾아서 디자인과 함께 시너지 낼 수 있도록 커뮤니케이션 해라.
이 당시가 눈물을 마시는 새 아트북인 '한계선을 넘다'를 구상하고 엮는 작업을 하는 중이었습니다. 게임 회사에 와서 게임 엔진 대신 인디자인으로 원고를 들여다보는 시간이 더 많았는지라 좀 괴로운 시점이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저 조언을 듣고 제가 하는 일이 맞는 방향이겠거니 하고 완성을 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후 해외 동료들과 함께 개발할 기회가 생깁니다. 첫 1년은 ‘희망 편’이었나 봅니다.
필요한 부품을 먼저 늘어놓고 룰로 조합하는 방식, 서사 요소를 쪼개서 사고의 지도를 그리는 방식이 신기해했던 기록이 적혀있었습니다. 서사를 중요하게 여기는 리더 밑에서 일하며 많이 배울 수 있었고요.
그런데 1년 후, 이런 기록도 남아있었습니다.
논의 방향이라도 알려줘... 사건의 원인이 되는 구역이 통째로 날아갔잖아...?
결국 그곳도 사람 사는 곳이었던 거죠.
통역사님들이 열심히 도와 협업의 틈을 줄여줬지만, 언어는 사고방식을 지배했고, 의사 결정의 문화적 틈은 예상보다 컸습니다. 그 이후 많은 게 달라졌고, 나는 조금 더 현실적인 사람이 된 것도 같습니다. 지금은 흘러가는 대로 존재한다는 말이 딱 맞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러니하게 느껴지는 건, 사람들은 여전히 게임 속에서 이야기를 원한다는 점입니다. 저 또한 기발하게 이야기를 전달하는 게임을 보면 흥분하고요. 특히 단서를 찾아 서사를 엮는 과정을 즐깁니다. 역사를 광적으로 좋아하던 어릴 적부터 꿈이 고고학자였는데, 결국 여전히 ‘복원’을 좋아하는 사람인 셈이로군요. 지금도 로어를 파헤치고 만들어 내는 걸 업으로 삼고 있으니, 물리적인 세계에서 하느냐, 가상의 세계에서 하느냐의 차이만 있는 것 같습니다.
다만 게임의 내러티브를 만든다는 건 시스템 설계와 협업 사이에서 늘 줄타기해야 하는 일임엔 틀림없는 듯합니다. 저의 몇년 간의 기록에서 느꼈듯이요. 여전히 어렵고, 잘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흥미를 잃지 않고 이 일을 아직은 오래 이어가고 싶습니다. 아직 제 업력이 짧아 '게임 내러티브 잘 하는 법' 같은 내용은 자신감 넘치게 말할 순 없지만, 적어도 계속 관찰하고 배우며 더 나은 이야기를 만들어가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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